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디지털 소외

구르미그린달빛아래 2020. 1. 8. 08:54

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께서 가방에서 주섬주섬 새 휴대폰과 유심칩을 꺼내시더니 나에게 이거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. 유심칩과 휴대폰을 넘겨받고 유심칩을 껴드린 후 휴대폰을 건네드렸더니, 다시 설정하는 걸 물어보셔서 몇 개의 클릭버튼을 눌러드렸다. 아주머니는 중간중간 고맙다고 하시며, 나이든 사람들한테는 너무 어렵다는 추임새도 혼자말처럼 계속 하셨다.

아주머니를 보며 작년 엄마가 친구와 태국에 놀러갔을 때 있었던 유심칩 소동이 생각났다. 4박 5일인가 패키지 일정이었는데 엄마가 가서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길 원했다. 언니가 알아보니 로밍,포켓와이파이,유심칩 중 유심칩이 가장 저렴했고 ‘엄마 이런 거 잘 못할거 같다’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‘진짜 하나도 어렵지 않다. 거기 나와있는 순서대로 따라하면 된다’고 언니는 걱정말라고 했다.

하지만 그 걱정은 현실이 되어 유심칩을 갈아끼고 연락을 해줘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았고, 언니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전전긍긍했다.

만 하루가 지나 호텔와이파이를 잡아 연락해온 엄마는 도저히 어떻게 끼는 지 몰라서 밤새도록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잤고, 심지어 엄마 친구는 유심칩을 가위로 잘라 휴대폰에 억지로 넣었다가 휴대폰이 먹통이 되어 한국가서 고쳐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. (유심칩은 이미 잘려서 나오니 톡하고 떼서 넣으면 되는데, 호텔에서 가위를 빌려 자르고 있었다는..슬픈 이야기..)

언니와 나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다가 (우리 둘의 첫 마디는 ‘어떻게 이걸 모르지? 넌 이해되냐? ‘아니’ 였으니까) 엄마 세대 (엄마는 1956년생, 베이비붐 세대이다)에게는 충분히 어려울 수 있겠다고 결론지었고 그냥 로밍을 해가시게 둘 걸 하고 후회했다.

기술의 발달, 최저 임금의 상승으로 요즘 버거킹,맥도날드 등과 같은 햄버거 프렌차이즈 이외 일반 식당에서도 쉽게 주문/결제 키오스크를 볼 수 있다.

키오스크 주문 출처: 여성신문

http://www.womennews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12146

어렵지 않게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하고 결제까지 하지만, 가끔 쿠폰 적용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되고 뒤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으면 젊은 사람인 나도 식은 땀이 나고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따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. 그러면서도 인터넷뱅킹을 알려드려도 어려워서 결국은 폰뱅킹으로 은행 일을 처리하는 엄마를 볼 때면 답답함이 밀려온다.

작년부터 아빠는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점은행을 통해 공부를 시작하셨는데, 회원가입,공인인증서 등록,과제 업로드,강의 듣다가 PC 멈추면 고치기까지 모조리 다 내 몫이 되었다. 짜증이 나기도 했고,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.

나는 아빠에게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하나하나 단계를 설명해 나갔고, 아빠는 입을 벌리고 화면을 한참 들여다본 후 종이에 내가 알려준 말을 적어내려갔다. 그런 아빠를 옆에서 지켜보며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직관적이어서 고민없이 클릭,클릭하고 넘어가는 일이, 아빠 입장에서는 한참 화면을 봐도 알수없는 ‘외계어 같은 한국말’이 되었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.


작년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향후 10년간 기술의 발전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고 2028년에는 자율주행기술도 상용화 될거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.

나는 변화하는 디지털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? 언젠가는 나도 디지털 소외를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, 지금으로선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진다. 다만 나이가 더 들어서 새로운 세상이 두려워져도 막례할머니처럼 시도해보고, 또 그녀의 손녀처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.

https://youtu.be/1BzqctRGgaU 출처: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<막례는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식당>